페허의 기획 - 메타 할로우(meta-hollow)                           김헌

분명 무엇인가의 퇴적체(sediment)임에도 존재한다고도 또 존재하지 않는다고도 할 수 없는 것이 있다.
우리의 지각(知覺)이라 부르는 세계 내에 고요히 또 아득히 더께진 채 뻗어있는 기억과 인식의 지형 역시 그 중의 하나일 거다.  
발화된 언어들이 만들어내는 사건은 물론이고 음악의 체험도 오로지 우리 의식 내의 토폴로지에서만 고유의 풍경을 그리지 않는가.

그 경험의 경이로움에 비해 현상 자체는 과연 그것이 외계에 존재한다거나 이를 규명해낼 수 있기나 한 지 의심스러운 대상으로 취급되고 있지만.  소리들은 그저 공기를 매질(媒質)로 취해 이의 단선적 변화량으로 진동을 발생할 뿐인데, 일단 우리 의식의 해독-분류(?) 프로그램을 거쳐 내부로 진입하는 순간 각기 자신의 위치에 안착하면서 어느새 친밀한‘다선'적 공간을 내면에 사상(寫像)해버리는 것이다.  

데리다의 말처럼 우리의 내면에서도 어김없이 시간은‘자기 밖'으로의 순수한 외출을 통해 공간을 ‘외면화'하는 건지도 모른다.  
20세기 중반 이후 이른바 현대음악의 실험적인 악보들은 이미 작곡가들과 그래픽 아티스트들 간의 경계를 지우고 있음을 우리는 안다.  아마도 스스로에게 발생한 이 같은 내면의 위상 공간을 선적인 요소들을 매개로 그들이 대거 번역해내려 했던 증거일 거다.  

어찌 보면 건축이 투사해내는 공간 또한 때로 선적인 요소들의 위상 진행으로 번역해 낱낱이
읽어내(decode) 볼 만한 일이 아닌가.  
언어와의 관계를 놓고 에코(Eco)의 생각을 빌어도 어차피 건축공간이란 기생적인 언어, 즉 미지의 언어에 기대어서만 자체의 의미가 낚여질 수밖에 없다면 말이다.  

최소한 내 작업의 초기에 개입하는 언어의 이른바 어휘소는 미지의‘선'들로 짜여 진 코드들이며
이들 간의 인력(引力)이나 반발이 극성(極性)이나 자성(磁性)을 띠며 늘 어지럽다.  
이 코드들은 역시 내 심상의 퇴적지형을 타고 오르내리며 물질적 공간적 기획의 크고 작은 기착지를 향해, 최적화의 옵션들을 놓고, 수없는 스캔 행위를 거듭하는 것이다.  
여기서 전제되기를, 이런 여정을 따라 차츰 조직된 언어들이라 할지라도 초기에 상정된 바 있는 미지와 이질성, 원시성은 여전히 그 행간의 선도(鮮度)를 유지해야 한다.  

내 작업에서의 선은 어떤 존재의 임계(臨界)이기도 하지만 사실 ‘부재'의 임계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선은‘부재'이고자 하는 욕망인 것이다.  많은 지성들이 공감하듯‘부재'를 재현하는 일은 이것이 처한 고유의 역설적 필연에 불안하다.  부재의 대상으로서 무엇인가 전제되고 이 부재가 가장 완벽하게 재현되는 순간 그 ‘재현'은 사라진다는 운명 말이다.  

결국 내 작업이 추출하는 선들의 많은 부분은 어쩐지 부재의 기슭에서 궁극에 얻지 못할 모종의 재현, 그 틈을 노리며 서성이기 마련이다.  기슭이란 늘 어떤 두 개의 상반되는 영역이 부딪고 갈등하며 교착(交錯)하는 경계가 아닌가.  
한편 점유와 부재를 가르는 경계는 단순히 선의 차원을 넘어 내게 있어 차라리 존재론적 망(望)의 영역이다. 관념의 차이로 대립하는 양극을 긴장어린 시선으로 번갈아 바라보거나, 공히 양측으로부터의 소외로 신음하며 특유의 불안으로, 비결정질로 떨리는 주파수다.  소리의 실체 보다는 묵음, 여백 중심의 선적인 진행, 즉 케이지(Cage), 헨쩨(Henze), 슈니트케(Schnitke), 페르트(Paert)등 헤아릴 수 없는 현대 작곡가들의 음악이 약속이나 한 듯 한결같이 추구하는 전략, 또는 실재한다고 믿어지는 대상에 대한 치열한 회의를 보라.  

현실에서 우리가 경험하게 되는 경계 공간 역시 정작 그 안에 들어서면, 아니 들어설 수 있다면 존재에게 전혀 친절할 리 없다.  이의 드세게 밀쳐내는 힘을 견디며 그저 양편을 살피는 불안정한 시선의 흔들림만이 그 의미를 갖는 영역일 거다.  공간 속에서 점유와 부재의 차원이 교차하는 경계의, 무한한 밀도로 한없이 가느다란 선 역시 물질과 비물질들 간의‘바라보는'일(望), 또는 그 성분을 조금이라도 함유한 본연의 제스츄어들이 그 의미의 순도를 결정한다는 생각이다.  
조망, 관망, 탐망, 야망(horizon), 희망, 요망, 선망, 욕망 등에 이르기 까지.  

한편 건축 말고도 알다시피 모든 작(作)이나 출(出), 현(現)등의, 무언가‘만들어내는'운명과 사건에 연루된 최근의 진보적 인물들에게도 약속이나 한 듯 선은 가장 유효한 초기 발상의 매개가 아닐까란 추측을 해 본다.  

물론 각기 내용은 다를지언정 그들에게 선이란 기억과 시간, 행위, 상징, 신호, 정보 등, 수많은 인식과 경험의 가닥들이 꼬여 물화, 체화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영역일거다.  또 때로는 이들의 궤적이며 침적(沈積)을 암시하는 모종의 광맥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작가에게 여전히 선은 상처의 영역일 수밖에 없다.  
외부의 인물들이 추측하는 바와 달리 작가의 내면 인식의 퇴적지형은 황폐와 방황의 영토이기가 쉽기 때문이다.  

벤야민(W. Benjamin)이 이미 오래전 그의 글에서 밝히듯, 작업의 세계에 갇혀 버린 인물이나 이에 거리감을 잃고 무례하게(?) 접근한 대중은 수없는 상처의 가능성에 노출된 반면, 이 세계에 부주의한 인물들은 예술이라 칭해지는 것들과 대체로 캐쥬얼한 관계에 놓여있을 것이기에.  

이런 생각의 연장선에서 내 작업의 경계에 도려내지고 삭제되는 이른바‘부재'의 윤곽선들은 보기와는 달리 예의상처로 거칠어진 야성의 영역으로 읽어져야 한다.  우선 뜻밖에도 이것들은 무언가의 구축이나 점유를 향한 벡터방향이 아닌, 도리어 존재의 소멸, 이의 초기화로 향해 이미 반환점을 돈 이후의 벡터 선들이다.  

애초부터 물질과 공간의 외곽에 대한 기획이 유일하게 시선을 둔 기착지는 하나의 형이상학적‘폐허'가 증거 하는 시간의 역류이며, 그 언어, 의미들이었으므로.  이 공간은 분명 근대의 작가들이 이지적으로, 냉건하게 재단해내던 외부공간의 제반 논리들로부터 비껴서있다.  그렇다고 한편으로 공간적 서사의 풍요로움에 관심을 둔 일도 더욱 아니다.  그저 비의(秘意)로 침착하기만한 균열과 침식의 영역이랄까.  

또 이 공간의 경계를 이루는 모든 선들은 존재로부터가 아닌‘부재'로부터의 침식으로 그 진행이 암암리에 설정된다.이미 경계와 부재의 아말감은 초기화 된 것이다.  나아가 이 장치는 현대의 가장 엄한 자본주의적 강령, 즉‘효용'과 관련한 제반 가치를 슬쩍 모른척한다.  소위 비극적 리얼리즘이란 화풍의 역사적 피봇 힌지가 된 셈인 카라바지오(Caravaggio)와 그의 종교화는 나의 이 같은 치우침을 심리적으로 지원하던 사건들 중 하나다.  그 자신 쫓기듯 바닥의 삶을 영위했던 때문인지는 몰라도 시대를 지배한 종교적 숭고함, 그 가치가 주는 억압에 대해 그의 그림들은 무례하다.  대들듯 자신의 화폭에서 간단히 성스러움의 윤기를 거두고 대신 삶의 고단함, 일상의 처연함을 감히 그 표층에 내 걸고 있다.  

내 작업에 기획된 ‘폐허'의 장치는 어떤 면에서 현대 사회가 의뢰한 용역에 대한 은밀한 위반이며 카라바지오적 불경(blasphemy)의 기록일 수 있다.  장소란 캔버스에서 상업적 자극이나 자본주의적 효용의 윤기를 번번이 벗겨내는 공간적 스트로크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공간이 지닌 고유의‘탈논리'와 사적인 사유 경로 탓에 그 의미들을 공공연하게 밝히거나 논점으로 삼고 싶은 생각이 처음부터 없었음을 밝히지 않을 수 없다.  

어쨌든 내면적으로 나는 이 장치를 편의상 형이상학적 공동(空洞; meta-hollow)으로 통괄, 이해하고 있는 편이다.  거듭 말하지만 내게 있어 이‘부재'의 장치, 메타 할로우는 작가적 상처의 영역이며, 존재의 균열에 대한 시화(詩化)의 욕구일거다.  

또 공간적 의미들이 애초에 빛을 잃고‘몰락'해가는 현상에 대한 까닭 없는 매료,
그 두근거림 일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