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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갈피에 숨은 어둠                                          김헌

장소에 공간이 구축되는 행위를 궁극에 개체 세포 분열의 일종의 과도기적 다이어그램으로 치환해 이해하고 들여다보았던 작업이었다고나 할까.   늘 그렇듯 장소와 프로그램이란 것에서 작업의 윤곽을 더듬키 위한 한 줌의 단서도 미쳐 건져 올릴 수 없을 때 작가의 이성은 잠시 동요하기 마련이다.   결국 대안이 될지 모르나 사건의 스토리 보드를 내향적인 벡터 방향으로 설정해 진행하는 쪽으로 생각이 흘렀다.  이 경우 출판도시란 단지의 마스터플랜을 하나의 커다란 셀(cell)로 취급한, 그다지 위험스러워 뵈지 않는 전제를 필연으로 한다.  그 셀은 단지의 각 영역들과 이에 딸린 다양한 성격의 여백들로 분화하며 다시 한길사 사옥이란 개체와 그 여백에 이른다.  여전히 개체의 속성은 전체의 속성을 함유하며 그 속성의 발현과 동시에 하위 구조로의 분열, 두 가지 현상이 복합적으로 발생한다고 본다.   여기서 건축 행위란 바로 이 순간을 포착한 작업이 된다.   던져진 프로그램을 모종의 우수한 형식으로 집성(集成)하는 일이 통상의 건축 행위에서 기대되는 미덕이라 해도 이를 잠시 유보할 필요가 있다.  이른바 탈통합(disintegration)의 모드가 훨씬 더 유효한 전략으로 다가온 사건인 것이다.   일찍이 제들마이어(Sedlmayr)가 모더니즘 건축에 대해 쓴 소리 하듯 지적한 바 있는󰡐중심의 상실󰡑이란 이미지가 또 하나의 심화된 모습으로 재현된다.   네 개의 분화된 블록들, 대략 - 업무/자연/기계,설비/문화 등의 하위 셀들로 수렴된 - 을 공간 경험의 혈맥과 신경망으로 연계하였다.   코리어그래피(choreography)적인 공간이동의 리듬과 이의 모니터적인 장치들, 밀폐와 침잠, 내부 자연에 투상 된 심상 풍경, 대자연의 관조, 헌사적(獻辭的)집회의 리츄얼(ritual)한 무드, 문화 공간 속의 수런거림 등.   피복 동판의 그  부식된 톤은 그저 한 방향으로만 시간을 기록하려 드는 우직함이 미더워 입혀 보았다.  그 오류가 지적된 지 오랜 베르그송(Bergson)의 시간 개념- 현재들의 축적된 모습이라고 보았던-이 어쩐지 이 장소에 만큼은 편안하게 받아들여질 것 같은 착각도 없지 않다.   인간의 경험을 감각 자료(sense data)로 대응할 수 있다고 본 러셀(Russell)의 생각은 애초에 이 작업이 제시하는 경험과 관련지어 사고의 흥미로운 바탕으로 자리했었던 기억을 한다.   즉 본 건축의 경험은 크게 공간의 친밀성, 익명성, 미지성의 영역 등으로 나누어진 카테고리들 사이에서 위의 감각 자료들 간의 교착 다이어그램을 통해 발생할 것이라 본 것이다.      

책갈피......   이 장소에 약속된 건축 유형으로서의 북셀프타잎(bookshelf type)이란 애칭(?)이 시사할 법한, 책들의 표층적인 형체나 이미지, 규격 등에 딱히 관심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정작 쟁점의 시선은 난필(亂筆)이나마󰡐건축의 책갈피󰡑에 재어놓게 될 언어 내지는 문장들의 의미와 그 선험의 통사(syntax)에 닿아 있었던 것이다.   그런 면에서 어쩌면 한길사 사옥의 건축 행위는, 언젠가 박완서가 그녀의 글에서 다루었듯,󰡐빛의 갈피에 숨은 어둠󰡑처럼 은폐된 감각 자료들(sense data)의, 일견 황망한 듯한 갈겨쓰기와 그 편집 작업에 가깝다.   물론 이 은폐 내지는 갈겨쓰기의 특성은 표면에 특유의 낯설음의 아우라를 형성하고, 동시에 타자의 경험이 그 내부에 의미의 침전을 이루는 작용을 적극적으로 저해하도록 기획되어진 것이다.

한편으로 이 작업은 구축된 공간과 이미지들에 투사되며 타자에게 발생할 추후의 경험과 의미들이 수시로 모종의 연결고리에 맺히도록 이끌어 내려 했던 나름의 기획과 이의 땀땀한 기록이기도 하다.  나아가 위의 도출 작용을 자극할 공간 언어들을, 어쩔 수 없이 함축, 환기, 연상, 제시, 지시 등의 언어들에 제한될지언정, 매개하는 장치들의 집합이라 볼 수도 있다.   마침 이 언어들은 한때 콰인(Quine)이 시어(詩語)의 그것처럼 번역 불확정성을 내포한 언어들이라 보았던 것들의 구조를 지닐 수밖에 없다.  이른바 정글(jungle)언어란 이름으로 역시 그가 주조해 설명하려 했던 이 언어구조에서는 예상대로 통상의 약속과 지시를 우선 배제한다.   단지 '자극 의미'(stimulus meaning)라 불리는 하나의 낯선 의미 틀(framework of meaning)의 작동에 의해 익명의 공간에서 경험된 코드들의 해독이 큰 폭으로 율동할 뿐이다.   익명의 공간이 과연 예의󰡐의미의 정글 공간󰡑으로 인식되기 위해 몇 가지 주된 촉매 장치들이 개입되었다.   예컨대 단지 수 공간(pool)만을 담고 있을 뿐이나 예사롭지 않은 볼륨으로 비워진 하나의 블록 / 두 개 층 높이의 양측 벽 사이의 테라스 / 천정을 포함해 3면이 에워싸인 채 여전히 외부 공간임을 고집하는 3층 데크 브리지(deck bridge)의 양 단부(端部)등에 매복된 장치들을 말한다.   더불어서, 보다 더 성기고 미온한 듯 하나, 콰인(Quine)적인 󰡐의미의 정글󰡑이 들어서기 위해 한 겹의 광역적이며 만연한 전략이 배경에 개입한다.   무의미의 물화(物化)라 부를까.  비교적 큼직한 의미의 괄호(parenthesis).   이의 두드림, 그 환청.   지속적으로 정위와 역위(eversion)를 거듭하며 뒤집혀 들어내지는 내-외부 공간의 피복 / 또는 단속적(斷續的)으로 도려낸 듯한, 다양하게 직조된  네거티브 공간들, 그들이 속삭이는 내러티브 / 또는 태생적으로 후경(後景)의 본능을 지닌 랜드스케이프(landscape)적 요소들과, 전경(前景)의 극성을 띤 인스케이프(inscape)적 요소들의 상(像)이 수시로 전도(顚倒)되는 현상, 등이 이 물화된 무의미란 역설에 조직적으로 가담한다.   이쯤에서 이제는 이미 흔해빠진 논지가 아닐 수 없으나, 장소를 차지하는 어떤 것도 언표(言表)와 동시에 자신을 숨긴다고 본 하이데거의 말을 곁들이고 싶어진다.   또한 그의 사유하지 못함이 결국 사유 자체의 운명이란 말.... 경험하지 못함이 결국 경험 자체의 운명이란 뜻으로도 확대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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