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념의 언어, 언어의 관념                                     김헌

개인에게 발생하는 이른바 관념(觀念)이란 어휘 자체에 운명적으로 품어진 일부 유폐(幽閉)의 속성을 가끔 생각해 보면 흥미롭기도 하고 여전히 의아한 점도 있다.  주로 이 말의 당당한 반을 차지하고 있는 념(念)이란 부분 때문이다.  개인의 내면에 발생하는 복잡한 인식론적 난맥상을 굳이 설명하려 드는 건 그다지 옳지 않다고 느낀 어떤 지성이 오래전에 편의상 고안해낸 표현일 거다.  그래선지 이 어휘는 집단이 공유하는 무엇과 연관 지어서 쓰이는 일은 대개 불편해 한다.  어쨌든 이  념(念)이란 글자는 최소 두 가지 엄연한 사실을 우리에게 알리고 있는 셈이다.  개인의 내면에는 분명 언어적으로 소통이나 표현 불가능한 일들이 수시로 발생하며, 대신 그것들의 증발이나 용해에 대비 피난처(shelter)를 제공하거나, 그것들을 면밀히 쓸어 담거나, 혹 단단히 틀어막거나 할 어떤 하우징 또한 분명 존재한다는 점이다.  이  념(念)이란 존재는 필연적으로 본연의 유폐 공간을 벗어날 수 없기에 누군가의 관념(觀念)이 소통되거나 표현되고, 나아가 이해되고 있다고 믿어지는 순간 사실 념(念)은 머문 채 관(觀)만 활개 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관념이란 말을 둘러싼 미신은 오랜 시간 쉽게 퇴치되기 어려운 모양이다.  

이렇듯 누군가 개인이 언어를 매우 사적으로 운용하고 있음을 거듭 밝힌다 해도 타인들은 종종 그 내용물을 궁금해 한 나머지 열람하려 들기 까지 한다.  더구나 지적 문화적 예술적 생산 따위의 매개로 언어를 가동하고 있다면 그 작가의 '발화'된 언어 또는 글을 통해 그의 의식 안으로 훨씬 빠른 속도로 근접할 수 있다는 믿음 또한 흔들리는 법이 없다.  대개 위의 두 언어는 분명 계열과 속성이 서로 다를 것임에도 말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언어로 전달된 내용은 마치 그 작업의 본질로, 언설을 통한 표현이 생략된 것은 이의 심오함으로, 또 굳이 언어로 표현이 가능치 않다고 밝힌 점에 대해선 오히려 이를 경험하는 감상자 측에서 자신의 무지로 방향을 돌려 이해하고 마는, 세간의 전형들이랄 수 있다.  

언어가 사적이란 말은 우선 개인이 그 구조를 밝히길 원하지 않는다는 뜻도 되겠으나, 밝히는 일이 무의미 하단 뜻이거나, 사실 밝힐 방도가 딱히 보이지 않는다는 뜻이 가장 짙을 것이다.  나 역시 이 경우에 간단히 해당되는 인물이며 그래선지 불필요한 어려움으로 매번 어눌해진다.  일상의 내게 있어 언어는 하나의 커다란 집진(集塵)장치처럼 웅웅대는 표면을 내면에서 가동한다.  외부로부터 발화된 또는 글로 써진 잡다한 속성과 기원의 언어들은 먼지처럼 그 표면을 드나드는 동안 걸러지며 수 없는 자취와 패턴들을 남기고 있다.  타자의 의미와 인식과 경험의 로샤(Rorschach)테스트 지들을 그것들은 내게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내 의식의 표준 렌즈는 이들을 비교적 평온한 눈길로 한 발치 떨어져서[疏隔] 기록한 후 또 다른 영역에 늘어선 서류함들 속으로 우편물 분류하듯 거의 무심코 던져 넣게 된다.  이 영역 또한 나의 작업과 관련지어 아주 지극히 개인적인 예비[latent]사고의 복도란 공간이 된다.  사실 작업이 현실적으로 이루어지기 위해 들르게 되는 또 하나의 영역이 있는 바 이는 생각들이 마침내 앙금으로 가라앉기 시작하는 체화[embodiment]의 복도랄 수 있다.  이곳에서 처리될 언어들은 지극히 사적인 관념의 격투기만을 위해 사육될 것들로, 따라서 매우 편협한 경로로 수집된다.  주로 변종 변성의 종자들인 이의 어휘소들은 일단 나만의 하우징에 가두어지고 나면서부터 앞서 소통에 쓰였던 일단의 형식이나 음성마저 잃고 대거 퇴색된 톤으로 부유하며 양생을 기다린다.  특히 작업의 외적 질서들이 그다지 두드러지게 감지되지 않거나 사건의 초기 가동을 위한 사고의 단서들이 빈곤할 때 대안처럼 이 언어 중심의 공간적 조형적 사고는 앞서의 체화의 복도를 서성이게 되는 것이다.  이런 경우 늘 그렇듯 내 의식의 렌즈는 반사적으로 사건 자체가 품고 있는 내적 질서와 필연, 그 엄연함이란 시야로 옮겨와 한층 매크로화하기 마련이다.  

하나의 주제어[thematic term]를 원초적 산모로 둔 채 공간은 그 불안한 재현[representation]이란 여정에 나선다.  부재의 대상으로서 무엇인가 전제되고 이 부재가 가장 완벽하게 재현되는 순간 그 ‘재현'은 사라진다는 근원적인 불안을 말한다.  그 경로에 내 사적인 하우징에서 부유하던 변종, 변성의, 야성을 띤 공간적 물질적 의미들이 수시로 주제어와 반응하고, 그 표면에 발생하는 균열들이 심화되어 균열의 언어들로, 그 언어들은 또 다른 변종의 물질과 형상이란 기표들로 환원되기에 이른다 할까.  그 기표들은 각기의 공간언어들로 전사(轉寫) 되며 어패류처럼 건축의 상피에 들러붙어 마침내 시간을 견딜 채비를 갖출 것이다.  관념의 념(念)은 마치 언어의 생화학적인 프로세싱을 거치며 공간에 그 윤곽을 서서히 드러내는 것이다.  이는 한편 언어적 소통과 의미들과 연관 지어 볼 때 분명 부재의 윤곽이기도 하다.

내 작업의 주제어로 등장하는 언어들은 장소와 공간의 의미와 맞물려 아마 크게 서너 가지계열의 어휘들이 아니었을까 하고 되짚게 된다.  

우선 대개는 장소와 프로그램 등에 내포된 의미들의 표층, 또는 인식과 경험 사이의 표면에 발생하는


[균열과 탈락]


등에서 파생하는 어휘들의 계열이 최근 들어 지배적이다.  이것들은


[인식과 경험-의도와 경험-경험과 시간-시간과 물질-시간과 기억-장소와 공간-장소와 물질-공간과 물질-물질과 구축-구축과 소멸-존재와 재현...]


따위의 사이에 근원적으로 개입하며


[간극과 난맥, 분열과 함몰, 거리와 이질감, 소외와 배타, 차이와 틈새, 단절과 결별...]


등의 매개어들로 파생한다.  때로는 공간 속에 베어내어진[sliced], 또는 덜어내어진 시간과 관련 그 의미 본연의


[골짜기나 심연...]


등으로부터 파생한 것들도 있다.  

한편으로 장소 고유의 현상적 지형적 풍경적 속성에서 작업의 중심 주제어가 발생해 공간, 프로그램, 물질, 형상 등으로 옮아가는, 어휘들의 전이와 파생을 내면에서 경험하게 되는 일도 있다.  근본적으로 대치할 수밖에 없는 세력들, 의미들, 현상들, 또는 욕구들 간의 긴장 구도와 그 울림을 작업에 새기게 되는 경로다.


[경계, 한계, 임계, 접점, 접면, 변경,...]


등의 의미를 공유하는 어휘들 사이에서 작업의 중심 주제어가 그 혈통을 얻는다.


또 공간적 장소적 의미들 간의


[분열이나 불안]


이 초기에 감지되는 작업을 대하면서는 인식과 경험을 둘러싼 의미들의


[부재, 공백, 공동(空洞), 모호, 소거,] 또는 [ 이중성, 다중성, 교착, 당착...]


등의 계열 어휘들이 자라나는 영토 어딘가에서 언어들은 발굴될 것이다.

모종의 변종이나 변성에의 갈망이 우리의 의식 저변에 차고 앉아 좀처럼 자리를 내줄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면 아마 이에 가장 우선적으로 응답하는 것들이 언어를 매개로 한 상상력이나 수사학일 거란 생각을 새삼 해 본다.  균열, 간극, 심연, 공동(空洞), 임계, 분열, 교착 등의 계열 어휘들로 출발한 내 작업들의 경우 역시 거의 예외 없이 같은 형식의 공간-물질 언어들이긴 하나 수년간 반복해서 '변모'된 내용으로 기착하는 것들이 있다.  이것들은 전적으로 공간의 내 외부의 경험이나 인식을 끊임없이 방해하도록 프로그램 된 이른바 중간적(intermediate)장치들, 또는 공간이나 물질 본래의 의미들을 매 순간 교란시키는 과도기적(transitional)형식들로 개입한다.  예컨대 반사 못(reflecting pool)[물질-비 물질 간 경계의 울림] - 경사로[평면-중력간의 긴장] -  외부 계단[동적인 제스처와 정적인 관조간의 긴장] - 필요 이상으로 장악된(arrested) 외부 공간[내 외부 공간 이벤트들 간의 마찰] -  브리지[균열의 치유 또는 해소] - 천창 - 이중 외피 - 등이 이루는 교묘한 조합들 일거다.  이런 류의 장치들은 매 순간 기존의 견고한 공간적 물질적 시간적 의미와 그 경험, 기억 등에 자상(刺傷)을 입힐 것이며, 반면 그 때 마다 우리의 인식이 리셋(reset)되길 바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