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밀한 위약(僞藥: placebo)과 위반의 연대 - botox 도시                     김헌

인식과 이해의 주름살

botox는 신경세포 내의 근육 신경 전달 물질(아세틸콜린이란...)의 저장소를 일시적으로 파괴시켜버리는 약리작용을 한다.  신경의 말단에만 선택적인 친화력을 갖는다는 뜻인 모양이다.  
언제부턴가 참을성을 잃어버리고 있는 도시를 본다.  대상에 대한 인식이 자연스레 동트고 이해가 밝아오면서 우리에게 생길법한 주름들과 그 속에 접혀들 개체의 정체성의 골들을 미연에 못마땅한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인식계의 말단을 파고들 듯 선점하며 특유의 신속성, 친화력, 무마의 제스츄어로 직감과 즉단(卽斷)의 수액을 서둘러 주사하고야 만다.  약효가 한시적임을 알기에 인간의 내성(耐性)이나 습관성 여부가 면밀히 분석되고 있음은 물론이다.


장소의 주름살  

botox의 희석액이 침투된 피부 근육의 부위는 국소적인 마비, 이완과 함께 주위의 신경망으로부터 차츰 절연된다.  임의적이고 일회적이나마 비로소 조직의 주름들은 마비와 도취 속에서 강한 배타와 자기부정을 내건다.  썩은 소시지 정도에서나 발견되던 독소가 어느덧 아름다움과 관련된 꿈같은 언어들과 함께 뒹굴며 우리의 입 속에서 뭔가 보랏빛 희망을 일깨우는 발음의 음소들을 갖는다고나 할까.
교정(矯正)작업에서 소외된 듯한 도시의 장소들이 갖는 시간과 경험의 깊은 주름들은 의심할 것 없이 추하다.  도시는 정비와 개발이란 이름으로 예의 주름들을 말소하며 승리의 찬가를 짓고 건축은 애써 코와 눈을 막으며 국소적인 마취와 절연이란 일종의 위약(僞藥 : placebo)을 제공할 뿐이다.  그들은 예외 없이 시술전-시술후를 예증(例證)하는 선정적인 한 쌍의 그래픽 자료들을 들이민다.  그러고 보니 우리는 오늘도 청계천의 주름시술 후를 그렸다는 한 장의 에로틱한 포토 몽타쥬에 취해 가벼운 몸 떨림 마저 겪고 있지 않은가.


문화의 주름살

피복과 피막, 포장(包藏)과 당의(糖衣),표피와 표층, skin과 screen, image와 icon 등의 영역이 문화의 모든 현상에 걸쳐 그 어느 때 보다도 도착(倒錯)에 가까운 모습으로 숭배되고 있다.  이들 껍질들은 내부와 내용, 내면, 내연(內緣),본질 따위를 간단히 대체하고 그 존재 여부마저 굳이 묻지 않기로 한 불문율을 상기시킬 뿐이다.
이마와 눈가의 주름살을 일시적으로 이완시켜 인간에게 바야흐로 연령대의 메뉴판이란 기적을 배달하는 botox의 주사액은 어쩐지 시작에 불과할 것이란 예감도 든다.  과연 연령의 개념은 곧 정신의 그것으로 매끄럽게 번역되며 6개월 남짓한(약효의), 젊음으로의 시간 여행을 허할 비자가 발급될 것인가.
도시에서 건져진 논리에 의하면, 넉넉한 시간의 더께가 쌓이고 다시 이의 더딘 균열로 표면에 발생하기 마련인 고결한 실금들, 또 이들이 함몰된 주름은 급히 지워져야만 한다.  박피(薄皮)의 아슴한 톤과 섬약한 피질의 촉감에 지나칠 정도로 경도된 건축의 페티시즘 역시 드센 삼투압으로 작가들 사이에 번져가고 있다.   핏기 없는 표면의 성형미학은 논하되 이의 나이 듦을 기록할 매체란 애초에 경원(敬遠)하자는, 차갑고 냉정한 그들 세대간의 암묵적인 연대인가.


가치의 주름살  

달리 생각해 보면 botox의 시술행위는 우리로 하여금 나이 드는 속도가 6개월이란 초고속의 분모를 갖게 하려는 음모를 감추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나마 내성이나 중독성이란 것이 주장대로 없다고 친다 하여도 우선 미용을 위한 성형시술은 FDA가 공인한 바 없다고 한다.  여기서 시술자와 피시술자의 은밀한 위반의 연대는 개발의 주체와 도시간의 모종의 피학적 쾌감으로 결탁된 연대를 충분히 연상케 한다.
시간의 축적을 노출하는 모든 것들을 만나면 곧 도시는 고(古)란 우울한 톤의 타이틀을 붙이며 으슥한 인식의 게토(ghetto)로 안내해 머물도록 한다.  반문의 여지없이 새로움의 약액이 도는 듯한 이미지들에만 값을 쳐 주기로  한 것이다.  끊임없는 소거와 순간적인 복제에 이은 폐기의 시퀀스는 새롭고 건강한 윤리다.   모든 상업주의적 산물들은 어제 자기가 뱉어놓은 것들을 앞 다투어 스스로 비난하는, 묘한 당착(撞着)의 축제를 벌이고, 행여 오늘의 신선함이 발하는 가치에 미세한 주름이 잡히기도 전에 내일의 허상을 주사하는 명민함을 그 강령으로 삼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