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표층에 불거진 ‘임의’와 ‘우연’의 미학적 어드벤쳐 김헌
일상의 표층에 불거진 ‘건축코드’읽기
그저 살아남는다는 것, 그것의 무게를 짐작케 하는 코드들. 그것들이 얼핏 두서없이 내걸린 익명의 구조물들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새로 읽게 되는 것일까. 일상을 살아가는 일의 중난함이 본의 아니게 드러나면서 그 표층에 불거지는 언어들이 엮어내는 또 다른 의미의 문맥과 정서라 보아야 할까. 무엇인가에 대한 제법 소박한 욕구의 몸짓과 처연한 견딤이 교차하며 발생시키는 미학이랄까. 어쨌든 건축가의 뚜렷한 ‘부재’가 아니었으면 얻기 힘들었을 아름다움이기도 하다. 그런데 좀 더 예민하게 따져 보면 그 속에서도 유독 건축하는 사람들만의 눈길에 뛰어들거나 복병처럼 무의식의 발길을 잡아채는 코드들이 번뜩이고 있음을 알게 된다. 우선은 그것들이 건축가 특유의 자의식에 대한 기습적이고도 짐짓 태연한 반격이 있었음을 알리는 코드들이기 때문인지 모른다. 물론 이밖에도 최초에는 짙게 묻어져 있었을 건축가의 자의식이란 것이 오랜 시간에 걸쳐 철저히 희석된 흔적을 보이거나, 처음부터 그것의 개입을 사양하고 있음을 알게 하는 코드들도 흔하지만. 이른바〈배운〉건축가들이라는 우리는 어느새 스스로 구축해놓은 교양의 폐쇄회로 속에서 앙상하게 제도화된 끝에 야생의 미학으로부터의 기습에 대한 면역력을 크게 잃고 있다는 점을 깨닫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혹 우리는 사용안내서나 취급설명서 따위를 작성하고 또 그것들을 남발하는 쯤에서 가장 지적이라고 여겨지는 듯한 건축행위의 마침표를 찍으려 드는 것은 아닐까. 더구나 우리는 이 같은 타성에 대한 의심을 좀처럼 보이는 것 같지도 않다. 따라서 불문율처럼 우리들 사이에 이미 확산되어 있는 일정한 어법에서 벗어난 듯한 낯선 태생의 건축언어들은 일종의 서자(庶子)나 사생아들로 취급하듯 여전히 인식의 변두리 부근에 제쳐두곤 한다. 그런데 그것들은 그리 대단치도 않은 지성과 전문성의 볕이 닿지 않는 음지에 버섯처럼 자생하고 있었던 것이다. 임의성과 당면성, 생존, 처절한 리얼리즘 등이 뒤섞여 뒹구는, 그리 익숙치 않은 미학의 코드들을 번뜩이며, 또한 사용안내서에 대한 무심한 오해와 방치, 그리고 취급설명서에 대한 통렬한 위반의 코드들의 이면에 숨겨진 뜻밖의 아름다움의 덫에도 우리는 자주 발길이 묶이지 않는가. 이 같은 파생과 변칙의 미학이 그려내는 정경에 맞닥뜨리는 순간 건축가는 그 자의식의 허를 찔린 듯한 아연함으로 잠시 넋을 잃고 이를 들여다보기에 이른다. 당혹감과 이질감에서 어설픔과 호기심을 거쳐 서서히 반가움과 사랑스러움의 정서로 번져가는 내면을 의식하며……
이로써, 그리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생각이지만, 보다 순도 높은 임의성(ad hoc)의 경험과 미학의 결정체를 추출해내기 위해서 우선적으로 투석(透析)되어야 할 성분의 윤곽이 어렴풋이 잡힌다. 앞서 밝혔듯이 이는 다름 아닌 건축가의 자의식에 맺혀져 있는 유해한 찌꺼기들이어야 할 것이다. 현상에 은폐되어 있던 의미가 억압으로부터 풀려나기 위해선 [건축가]의 소거가 선결되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물론 이는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는 점 또한 우리는 안다. 건축의 표층적인 의미 전반에 걸쳐 명확한 붓놀림으로 획을 긋고 있는 존재 역시 작가성이란 개념이고, 이의 배후엔 어김없이 갑각류의 껍질처럼 투철한 의식의 켜로 뒤덮인 그의 자아가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이쯤에서 건축은 필연적으로 물화(物化)를 전제로 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공간의 의미에 대한 예기치 않은 억압과 폭력의 가능성은 늘 잠재한다는 점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결국 위와 같은 위험인자들이 여과된 내용물로만 이루어진 건축가의 자의식이 작업의 내용에 살포되도록 늘 긴장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셈이다. 공간이 담게 될 타자의 충동과 욕구에 유연하게 튜닝이 된 채 임의성의 경험이 언제나 특유의 선도(鮮度)를 유지하기 위한 긴장이기도 하다.
익명의 구조물에서 건축가의 실종을 직감하면서도 한동안 우리의 시선을 거둘 수 없게 만드는 낯선 이미지와 그것을 감싸고 있는 코드들은 우연찮게도 건축가들이 가장 집요하게 파고드는 어법의 변종들이라는 점은 되짚어볼 일이다. 그려지는 이미지가 현시적이든, 추상적이든 어김없이 세련과 절제의 미학으로 수렴해가도록 다듬어지는 어법의, 이 같은 미학에 대한 지나친 집착과 경도(傾倒)를 보이는 현대의 건축가들의 허위에 찬 태도는 그 전염성과 확산력이 위력적임이 분명하다. 어쩌면 유전적이기까지 하다. 그들이 세계의 도시를 누비며 일관된 조형언어로 풍경을 물들이고 장소성의 싹을 잘라버리는 게임을 벌이고 있는 현실이 그걸 깨닫게 한다. 그들이 관심을 쏟고 있는 것은 그저 기묘한 차이의 게임뿐이 아닐까. 마치 잔치에 모인 속물들이 서로의 암묵적인 양해 속에서 세련됨의 잣대만을 놓고 다투기라도 하는 듯한. 특히 형태들의 소모를 연료로 삼아 상업주의 사회의 표층을 화려하게 덧칠하는 상품미학에 이르러서는 건축행위는 가장 첨예한 차이들의 게임에 뛰어든다. 절제에 관한 맹목에 가까운 신앙도 배운 건축가들에게서 쉽게 드러나는 자의식의 또 하나의 지배적인 성분임을 돌이켜 보지 않을 수 없다. 건축가가 결여된 건축에서 불거져 나오는 소박함, 버팀, 견딤의 미학에서 다가오는 종류의 정서가 아닌, 어딘가 거리감이 느껴지고 자칫 핏기 없는 아우라(AURA)를 지닌 절제이기가 쉽다. 단순과 비움, 여백 등을 통해 작품 속에 뭔가 심상치 않고 우주적인 의미를 쓸어 담아 넣으려 했던 몇몇 대가들의 미학이 고스란히 현대의 보편적인 작가들에게 형질유전이라도 된 듯하다. 모더니즘의 금욕적인 강령들은 채 성숙도 되지 않은 작가들에게조차도 실험에의 의지를 애초에 무마시키고, 대신 절제미로 향한 돌림병적인 편집증만을 안겨주고 있다는 혐의를 갖게 한다. 도시로 급히 나간 그들은 피상적으로 알고 있는 절제의 코드들을 휘두르며 공간에 은폐된 의미와 그 임의성의 발현으로 향한 출구를 원천적으로 틀어막는 전사들로 남는 것이다. 이 같은 행위의 극단에 선 최근의 젊은 작가들에게선 세기말적인 전략적 허무주의의 낌새마저 느껴지는 성향이 드러나기도 한다. 삶을 견딘다는 것의 무게를 알기도 전에 이미 건축가들은 예의 창백한 세련과 절제의 신앙에 입문하기 마련이다. 이어서 간단한 선교사 교육을 마친 후 그들은 이른바 건축문화라 불리는 허구적인 조화와 균형의 명분 아래 제도화된 폭력의 전파에 가담하는 것이다. 현상에 가려진 파생적 의미의 숨통을 더욱 조이고 〈건축가〉의 여백이 있는 자리들을 자못 친절하게 메워주어야 한다는 가상한 사명감으로, 이 같은 건축의 계도적인 태도를 매개하고 그 위세를 확장하는 주범은 다름 아닌 일류 건축저널이라 보아도 크게 틀리지 않는다. 일상에서 그것들의 페이지를 채우고 있는 이름들이나 프로젝트들의 대부분은 의심할 여지없이 일단은 건축은 폐쇄적이고 고도의 지적인 문화활동이라고 규정한 바탕 위에서 논의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거대한 담론이라는 난폭하고 조야한 공룡의 그늘 아래 변방적 삶의 고단함이 그려내는 경험과 의미의 지형도는 위축을 거듭할 수밖에 없다. 삶의 당면성과 임의성으로 인해 무심코 튕겨져 나온 우연적인 것들의 변혁적인 가능성과 그것들을 매개로한 기호학적인 모험은 저널들이 몰아가는 담론의 지류에 그저 산발적으로 드나들 뿐이다.
인식(cognizance)이라 불리는 지평은 일종의 위험과 즐거움이 마주치는 곳이며, 현상에서 의미작용의 차이화의 끝없는 공격을 피할 수 있는 것은 없다는 점만 떠올려 봐도 건축가에게 필연성의 틀은 이미 너무 협소하다. 그럼에도 지금껏 건축의 교육은 완공 당시의 연약한 현재성과 얄팍한 공간적 드라마에 초점을 겨누어 왔던 프로그램과 그 타성에 대한 추호의 회의도 보이지 않고 있다. 어찌된 일인지 기성작가들 또한 대부분 자신의 서명을 끝으로 공간적 사건이 마무리지어져야한다는 강박에 가까운 관념을 떨치지 못하는 듯하다. 하지만 그들이 떠난 자리엔 여전히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사건들이 전개될 것이란 점을 받아들이는 한편, 이를 염두에 둔 적극적인 개념의 여백이 남겨질 필요가 있다. 뜻밖의 장소, 계획 불가능한 사건, 교육과정에 없는 사건 등을 노린 츄미(Tschumi)의 잔여, 또는 잉여공간과 같은 여백일 수도 있다. 그 속에서 작가의 자의식은 비로소 목소리를 낮추고, 상대적으로 은은한 어조의 건축적 담화가 펼쳐지는 일이 가능해진다. 어딘지 한풀 꺾여 잔잔한 폭력, 은밀한 설득, 미묘한 자극, 심리적 유도, 무의식의 덫 등의. 이 경우 굳이 에코(Eco)의 말을 빌지 않아도 위와 같은 건축의 메시지는 늘 엉뚱한 시니피에(Signifie)를 수신자에게 전달할 잠재적인 가능성을 여전히 지닌다. 따라서 수신자의 잠정적인 위반을 용인하거나 오독(誤讀)을 폭넓게 수용하기 위해선 건축적 메시지는 최대의 강제와 최대의 면책의 폭을 오가며 전개되어야 한다고 본다. 그 틈에 돋아나는 새로운 형태와 공간의 기호들은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을 수 있는 문맥을 이루면서 우리의 의식 속에 추론의 장을 열어주는 것이다. 이 과정을 거쳐 일단 코드화된 현상은 보다 넓은 의미의 문화적 체계로 환원되기에, 삶의 공간 속에 돌출하는 당면성과 임의성의 체험과 미학은 새로운 작가성의 배경으로의 편입이 이루어진다. 현상에서 [건축가]를 지우기 위한 단서를 유일하게 건축가가 쥐고 있는 셈이다. 이미 이러한 점을 인식하고 있던 최근의 몇몇 작가들은 전적으로 임의성에 기댄 공간의 자생과 양육을 돕기 위한 다양한 실험들을 내놓고 있다. 건축가의 존재가 가장 희미한 삶의 바닥에서 서로간의 착종과 교잡을 통해 번식하던 미학의 코드들이 너무나 먼 길을 돌아 첨단의 실험과 만나는 순간이다. 괼러(Goller)가 언젠가 지적했던, 지배적이고 일률적인 양식에 대한 형식감정의 피로를 늘 그들이 먼저 느끼고 있는 것일까. 단숨에 어법들 간의 경계를 모호하게 흐리고, 배합과 교배의 묘(妙)를 터득한 듯 생존력이 강한 일종의 진성(眞性)잡종들을 끝없이 만들어내고 있기에 말이다. 건축가들의 집단이 수많은 형태의 소비를 통해 오히려 그것들의 미적인 가치를 낙후시키고 있는 동안에 그들은 작품으로서의 건축에 대한 특유의 무관심과 부주의함을 유지해온다. 예술작품에 정신을 기울이는 사람은 늘 상처를 받는다는 벤야민(Benjamin)의 말을 떠올려볼 때 그들은 최소한 그런 류의 상처로부터 자유로울 것이고, 예의 부주의함과 무심함의 정서가 뜻하지 않은 건축언어의 변종이나 어떤 일탈된 존재를 우리의 눈앞에 던져놓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주어진 형태의 문맥을 재해석하고 동시에 새로운 문맥을 엮어나가는 숨 가쁜 기호학적 모험은 건축의 앎의 자리가 아닌 삶의 자리에서 보다 격렬하게 일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 탓인지 건축가의 개입을 사양하거나 그가 증발된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자리엔 보다 짙은 빛깔의 묵힘과 삭힘의 건강한 이끼들이 피어 있기 일쑤다. 마치 삶의 무게를 견뎌내는 몸짓과 그 처연함이 한순간 응고되어 방부 처리된 듯한 생생한 미학의 코드들이 피어 있는 것이다. 건축의 역사를 질서에 대한 순수한 의지의 역사 이상으로 알고 있지 않았던 우리는 모든 사물과 현상의 정량적, 수치적 환원의 가능성에 대한 분별력 없는 믿음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런 방식으로 환원된 백색의 정보가 인간의 육체와 활동과 욕망 등을 아우르는 물질계에 잠입하고 침투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점에 대한 의심이나 반성의 낌새가 그다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건축가들이 지속해서 사건을 바꾸려 했던 것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사건들이 건축의 역사를 바꾸었고 역사는 다시 이미 구축된 건조물들의 의미를 변질시켰다고 보는 것이 옳으며 이 역순환의 고리 또한 쉽게 풀리지 않는다. 건축의 메시지는 소통의 과정에서 운명적으로 변질된다는 사실을 직시하고 오히려 이를 수신하고 해독하는 이들의 게릴라적인 본성을 이해하고 그것에 유연하게 대처하기 위한 다양한 실험이 따라야 할 것이다. 이쯤에서는 한때 자본의 총체적 타락은 매춘적인 타락이라기보다 대체(substitution)와 소통의 타락이라고 규정했던 바 있는 보드리야르(Beaudrillard)의 말에 귀를 기울여 봄직도 하다. 비슷한 시각을 갖고 본다면, 일상에서 돌발하는 다양성과 우연성을 짧고 얕은 건축의 어법 속으로 쓸어 담아내려는 건축가의 자의식과 이의 대체 욕구는 그의 작업과정에서 적극적으로 제어되고 거두어져야만 한다. 우리가 이미 알다시피 그 영역은 이른바 우연성이란 삶의 은폐된 의미가 수시로 드러나는 통로이기에 늘 말끔히 치워져 있어야 하는 것이다. 진정한 작가와 작품이라면 해석의 틀 속에 쉽게 들어오지 않는 삶의 여러 이치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그 긴장을 견뎌내어야 하지 않을까. 한편으로는 그 과정 속에 타자로부터의 다층적 해석의 틈을 발생시키려드는 어떤 성숙함으로 열려 있어야 할 것이다. 타자의 아름다운 오해 를 향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