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inking 1                                                  김헌

약간은 작가에게 무례할 수 있다는 심정이 들긴 하지만 문학을‘읽는’대신 때때로 그 이면을, 또는 주변을 여기 저기 훑어보는 일에서 관음적인 흥미를 찾는 일이 잦다.  작가가 열어놓은 문 대신 울타리 주변을 기웃거리는 것이다.  문학의 표층에 내세워진 서사의 흐름에서 수시로 내 시선은 미끄러지고 그 초점은 안정을 잃고 배회한다.  대신에 그 시선은 이야기의 큰 구조나 논리의 치밀한 정도라던가, 주제의식, 발상, 전략, 문체, 호흡, 디테일에서 구사되는 언어감각, 등을 일일이 짚어보거나, 효과적으로 끌어들인 소재의 레퍼런스들을 곰곰이 추정해 보는 일로 분주하다.  물론 공간과 관련한 작가의 모든 이해와 전략, 사건과 현상 또한 빼놓을 수 없다.  이 같은 의식의 산만함은 언젠가부터 나 자신도 모르게 덜컥 걸려버린 일종의 만성질환일 거다.  작(作)이란 문자가 주는 정서를 공유하고 있는, 지속해서 무언가를 구상하고 만들어내야 하는, 또 그런 류의 일이 주는 압력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대개 갖고 있을만한 병 아닌가.  갤러리에 걸린 그림을 무의식중에 따라 그리고 있거나, CF 마다 일없이 그 발상 과정이나 전략 따위를 추정해 본다거나, 영화 한 편을 다 본 후에야 어느 순간부턴가 감독과 함께 이를 연출하고 있었던 자신을 깨달을 때도 빈번하니 말이다.  어쨌든 대개의 문학에서 무엇보다도 공간적 인자들이 다층적으로 운용되는 일이 필연이란 것을 아는 이상, 건축하는 사람으로서 이 같은 내용을 쉽게 지나칠 리 없다.  문학의 경험이 진행되는 순간에도 내 의식의 가느다란 촉수 한 마디만큼은 자연스레 그 서사 공간 이면의 외연적(外延的) 켜와 맥들을 더듬고 있는 것이다.  마치 타인의 서류함 뒤지듯.   때로는 작가의 의식 깊숙이 내시경을 돌연 들이밀어 넣어 함부로 살피기도 한다.  이 때 문학이 생성하는 공간의 경험 중에 정작 그 밀도가 가장 높은 사건은 주로 작가 본연의 내면 풍경이란 사실을 확인케 된다.  그 곳은 무념 무감어린, 차고 건조한 모노톤이기도 하고, 또는 상실감과 우울의 물기어린 씨안(cyan) 블루, 불안 그득한 마젠타, 고독과 방황의 주위로 껌뻑이는 네온, 절망감으로 눈앞에 하얗게 터지는 백색광 따위의 빛에 싸인 공간이며 물질들이다.  특히 90년대 이후 이념도 현실도 아닌 도시나 사회적 불모 성으로부터 훼손된 감수성으로 쓰여 지고 있는 글들, 또는 이들을 배양해낸 낮선 공간들이 내겐 남달리 흥미롭지 않을 수 없다.  어쩌다 동시대의 도시 공간을 이 지경으로까지 몰고 간 종족의 한 하수인으로서 갖게 되는 수수(袖手)와 방관 섞인 흥미랄까.  
작가들에게 있어서 외출이란 언제나 그 도시적 일상의 비정함으로부터 불시에 기습을 당하는 에피소드를 포함한 사건일거다.  결국 건물들 사이 어둑한 틈새, 질척한 포장마차 뒤켠에 서서 구토를 쏟으며 하루를 마감한다.  이 같은 일들의 피곤함은 더욱 그들을 칩거로 몰고 얼굴에서 핏기를 가시게 하고 눈빛을 탁하게 하며 점차 말을 잃게 한다.  익명의 쎌 블록들로 차단된 도시의 공간적 장치들 틈에서 소설 속 타인의 아이덴티티는 단지 몇 층 몇 호 사람이라는 식의 단위 쎌의 이름과 들러붙어 인식될 뿐이다.  또 그 익명의 그물망에서 윤대녕이나 배수아로 하여금 끝까지 그 존재를 알려오지 않는 비밀클럽과 자신의 인물들이 교신하게 하고, 방금 건조한 섹스를 나눈 상대의 이름을 잊는다.  하성란 역시 밤마다 같은 아파트 이웃의 쓰레기를 몰래 들여와 그 때문에‘곰팡이 꽃’이 피어 버린, 위의 쎌 속 욕실에 틀어박혀 동이 트도록 그것들을 탐사하는 인물을 그리게 된다.  다시 배수아의 도시 위로는 ‘철공소의 불빛 같은 태양이 비추고, 대지는 풀 한포기 없이 메마르고 벽돌과 집들과 담장들은 모두 그 본래의 색을 알아볼 수 없는 먼지투성이에 주변에선 가끔 타이어 냄새가 강한, 구역질나는 바람’이 불어온다.  콘크리트와 네온싸인의 정글이 키운 감수성은 어딘가 훼손된 언어를 낳고 그 언어는 도시 곳곳에 돋아있는 변종의 자연에 교착(膠着)해 변종의 시간에 번식한다.  김영하가 다루는 탈선한 10대 아이들에게 심야의 자유로(路)는 난폭한 드라이브라는 모험을 초청하는 새로운 자연이고, 이를 거쳐 도착한 24시간 대형 할인마트에서의 피크닉은 그들에게 전원적 행보와 위락을 준다.  사실 이와 같은 정서는 백민석의 문학에서 더욱 극렬하고 밀도 있게 취급된다.  그의 인물들에게 역시 PC방, 대형 할인점, 시멘트 덩어리와 쓰레기와 잡초가 뒤얽힌 공터, 주차장, 공사 현장, 철거 예정인 건물들 따위는 액션과 사유를 두루 제공하는 친근한 자연이기 때문이다.  건축가라고 도시적 공간이나 일상의 불모 성으로부터 그 감수성이 면역될 리는 없다.  그래선지 개인적으로는 위의 작가들이 도시를 향해 드러내는 무정 무감의 윤기 걷힌 시선이 더없이 친근하다.  뿐만 아니라 때로는 뜻 모를 매료 감으로 이를 주시하게 된다.  어쩌면 내 감성의 유전자 어딘가의 형질 역시 일정 부분 다쳤을 지도 모르겠다.  나의 작업들 역시 잿빛 도시의 음지에 자라난, 예정에 없던 무기물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완성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느 순간부턴가는 유기되기 위해, 훼손되기 위해 존재 한다고 보는 것이 옳다.  마치 문학이 설정하는 대개의 섬약한 인격 형과 별다르지 않다.   도시가 가르친 잡다한 종류의 공간 인식에 일일이 애써 응하는 일도 저항하는 일도 아닌 어떤 창백한 응시의 시선만을 갖게 된다.  내 건축을 이루는 대개의 물질은 애초에 보살핌의 손길이 닿는 법이 없고, 공간은 곧 들이닥칠 외부의 힘에 쉽게 손상되도록(vulnerable) 저급하다.  외부의 힘이란 것이 글자 그대로 인접자연의 야성일 수도, 온 도시가 불문하고 한 방향으로만 맹렬히 내닫는 자본적 가치관일 수도, 공간을 점유한 타인의 신념과 인식에 근거해 급거 재단하려 드는 날카로운 메스들일 수도 있다.  
문학 공간 중 위에서 거론한 응시의 시선과 관련해 유독 내 사유를 - 만일 사유라 칭할 만한 것들이 과연 있기나 한다면 - 자극하는 건 작중 인물의 심상에 그 똬리를 틀고 있는, 암흑의 공동(空洞 : hollow)과 같은 류의 공간이다.   서사의 종지에 이르도록 그 의미나 실체나 윤곽을 파악키 어려운, 오래전에 말라버린 우물의 깊고 섬뜩한 밑바닥 같은 미지의 영역이다.  또 시커멓게 도려내진 그 거죽의 형상으로 도리어 우리의 의식을 노려보는 나락의 공간이다.  이런 타입의 공간에 감염된 문학 속 인물에겐 예외 없이 막막한 꿈과 생생한 악몽과 식은땀의 시간들이 간헐적으로 찾아온다.  오정희의‘옛 우물’은 유년기 전쟁의 폐허 속 고향의 기억이 작중의 여성, ‘나’의 의식에 남긴 자국이다.  그녀 역시 가끔 옛날 우물의 꿈을 꾼다.  언제나 두레박을 빠트린 채 해질 녘 우물가에 서서 우는 어릴 적 조그만 계집애인 자신의 모습을.  또는 그 곳에 빠져 죽은‘동무 정옥이와 함께 가없이 둥그렇고 적막하게 가라앉은 우물 속을 들여다보는’, 잠을 깨어서도 그 막막함이 가시지 않는 꿈을.  공동(空洞)의 공간에 대한 기억으로 우리 의식에 이는 이와 같은 전율이나 파문을 영화 또한 놓칠 리 없다.  당장 생각나는 것들 중 하나는 쓰카모토 신야의 실험 성 짙은 작업, ‘쌍생아(雙生兒)’의 오래전에 폐기된 우물 바닥 이다.  졸지에 이 곳에 유폐된 채 사육되는 인물의 행태가 주는 그 생경하고 불편한 느낌은 내 기억에서 좀처럼 털어내기 힘들다.  이 외에도 상업 영화, ‘링’에서는 좀 더 즉물적인 공포의 대상으로, 배용균의 소중한 영화, ‘검으나 땅에 희나 백성’,과  타르코프스키(Tarkovsky)의 초기 영화, ‘거울’에서는 공히 기억과 회상의 촉발장치로 우물의 외부공간이 동원되기도 했다.  어쨌든 앞서 말했듯 문학에서 다루는 공동(空洞)류의 공간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뚜렷한 현상학적 경험이라면 이것이 어떤 유기체처럼 적막에 싸인 채 우리를 응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건축 역시 운명처럼 표피와 속살을 갖기에 외부로부터 다양한 깊이와 형상으로 패인, 또는 도려내어진 공간들의 생성을 전제한다.  오로지 빛과 그 윤곽으로만 규정할 만한 공간이기에 사유 전개의 편의상 형이상학적 空洞(meta-hollow)이란 말을 지어내 내 사적인 인식영역에서만 한정해 쓰고 있다.  사실 비교적 초기의 것들부터 내 작업의 대부분엔 이와 같은 공동(hollow)의 공간이, 이미지들이 몇 가지 변이된(meta-) 모습으로 진화해 오고 있다.  여기에 게재된 작업들 역시 예외일 수 없다.  ibidem의 프로그램 간(interstitial)에 삽입된 로지아(loggia)식 메인 데크 공간이라든가, lacuna의 동쪽 데크, M retreat의 정원 쪽 누각(pavilion)과 본체 사이의 찢긴 틈새 공간, hiatus의 천공된 스크린 벽과 그 내측 진입마당 등.  이 형이상학적 空洞이 매 작업에서 공히 물리적 공간적으로 갖는 의미라면 건축의 외부적 경험과 내부적 경험을 중재하는(mediate) 존재로서의 그것이다.  반면 이의 관념적 의미는 장소와 프로그램, 물질과 자연, 인식과 욕구들 본연의 연속성 상호간에 발생하는 접면을 탈락시키려는 시도에 있다.   이른바 '핵심적 부재'(critical nothing)를 담은 공간이라 부를 수 있다.   나머지 이 空洞의 표층적인, 또 다분히 사적인 의미가 있다면 이는 현대 도시 공간의 불모 성에 말을 잃고 이를 가만히 응시하는 한 건축가의 무념어린 시선일 것이다.